고전 1:10
같은 마음, 같은 마음, 같은 뜻
예전에 말씀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들은 줄 압니다. ‘크린티아조마’ 이 말은 고린도인이 되다라는 동사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실상의 뜻은 당신 성적으로 부도덕하게 되었구만 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한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고 사람들은 변화 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고린도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뭐 이렇게 이해하는 분들이 아직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들 이 고린도 전, 후서를 보면서 흔히 생각합니다.
고린도 전후서의 내용을 착각할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후서는 사랑과 은사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성경에대한 상식이 있다라면 아실 것입니다.
고린도 전후서는 사랑이 없기에 쓰여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파당이 있었고 그 파당은 현대의 흔히들 교회 가운데 나타나는 현상들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 파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파당을 중시할 수 있습니다. 지역에 대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그리고 학연들이 있습니다. 지연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삼성그룹의 사람들이 많으면 삼성, 현대 사람이 많으면 현대.
교회에서 누구에게서 배웠습니다.
나는 원로 목사님에게서, 나는 담임 목사님에게서 바울, 아볼로, 게바 등의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는 바울이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다 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들에게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곡해를 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이야기만을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오직 예수님인데 배우는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 그들에게 우리는 사상을 배웠다 철학을 배웠다라고 생각하는 일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을 할 때에 그들은 강조점, 교훈만을 중요시 여기게 되어서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누구라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다르게 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온전한 신학을 한분들이라면 하나님 말씀을 바라보는 시각은 왜곡되지 않고 진정 그런 말씀이 어떠한 강조점과 어떠한 말씀을 교훈을 하는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 고린도에서는 그렇지 못한 상황이었다고 말씀합니다.
분명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들이 오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현대에도 이러한 일들은 교회에서 나타납니다.
가르치는 자가 왜곡을 시키든지 배우는 자가 왜곡을 시키든지 같은 말 같은 뜻을 가져야할 교회에서 다른 모습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같은 말, 같은 뜻, 같은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현대교회에서의 가장 큰 위험 요소가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요소가 생기고 어떻게 이러한 요소들을 없이 할 수 있는가를 말씀을 통해 깨닫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분쟁의 요소가 무엇인가요?
첫째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지혜에 대한 과신이라는 것입니다.
1:18-2:16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전부 인척 과장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아볼로에게, 바울에게, 게바에게 그리스도파에서 배운 것을 전부인양 포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저는 계속적으로 지금까지도 배우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알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또 배우면 배울수록 알 수 없다 라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조금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전부 인양생각하며 그것을 자랑한다라는 것입니다.
조금 배운 것은 금방 밑바닥이 드러납니다.
서로 간에 밑바닥이 드러나면 그때부터는 억지 밖에 남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조금 배워서 목사를 가르치려는 분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물론 저 같은 부류는 가만 안 놔둡니다. 상황이 되면 붙들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가르쳐 줍니다.
물론 목사의 권위와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 부류와는 말을 섞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조금 여러분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으나 오해 하지 말고 들으세요. 목사와 성도는 같다.
목사와 성도는 다르다. 저는 다르다 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물론 같습니다.
먹고 마시고 자고 실수하고 여러 가지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것은 목사에게는 목사와 성도의 신앙과 신학은 출발부터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을 이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성도와 목사는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걸고 목사의 일을 하기위해 예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말씀을 배우고 가르친다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 이러한 생각이 있는 분들에게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명을 걸고 하는 분들은 사실 떠벌이지 않고 조용히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말씀을 배우는 자세나 신앙의 자세는 좀 다르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이것이 결여 되어 있습니다. 아니요 나는 생명을 걸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할말은 없습니다.
생명을 걸고 여러분을 양육하는 분들, 성도는 가르치는 자를 존경하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현대의 신앙이 성숙되었다라고 말하지만 약화 되었다라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저는 평신도 사역에 대해 약한 부분들을 생각해 보면 서로 서로 나누며 말씀을 약화 시키고 복음의 진수를 헛되게 하는 것들을 보는 것을 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 성도들은 약화 시킨다라는 것입니다. 상황윤리를 만들어내고 자기합리화를 이루어 냅니다.
사실 목사님들에게 주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성도의 신앙의 자세는 어떠한가 물어보세요.
다른 이견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성도들에게 물어보세요. 다른 이견들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들이 생긴다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아무리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교수 앞에서 떠들더라도 그것은 금방 바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억지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냥 조금 배워서 그것을 너무나 크게 과장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에게 배웠는가 그리고 내가 누구의 팬 크럽인가를 자랑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혹시 이러한 이야기들 많이 하죠. 방송 설교를 보면서 내가 누구 설교에 은혜를 받았어..
저도 예전에 팬 크럽이었습니다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님 팬이었습니다.
말씀이 깔끔하고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설교이기에 좋아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별로 관심 없습니다. 집에 테이프 많이 쌓여 있습니다.
왜냐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의 말씀도 아니고 그는 나를 모르기에 나도 그를 모르기에 관심 없고요 저는 방송설교를 듣습니다. 그러나 참고 할뿐입니다.
누구누구 목사님의 설교 은혜 받았어 그것이 혹시 여러분들 함께 나누는 토론의 내용입니까? 누가, 어떤분 설교가 은혜로와, 나도 들어야지...그것은 무익합니다. 그냥 여러분들 혼자 은혜를 간직하면 됩니다.
주일설교가 여러분들의 토의 내용이 되길 원합니다.
큰 은혜를 받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모습이 되려면 우리가 성숙된 모습의 신앙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교회에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목사의 말씀 속에서 은혜를 취하는 여러분이 되길 축원합니다.
그러면 같은 말, 같은 뜻, 같은 마음이 되어집니다. 왜냐 다른 것이 여러분을 변화 시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의 뜨거운 심장이 여러분에게 이식되길 축원합니다. 주일 오전 오후설교, 수요설교, 금요설교가 여러분에게 은혜가 되길 원합니다.
둘째로 3장부터는 인간적인 교만이 있기에 이러한 분쟁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는 은사나 달란트가 있고 그것이 인간적인 일, 하나님의 일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3장에서는 그 은사, 달란트를 공력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교만한 공력들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공력은 타서 없어지지만 진실함은 남아 있다라는 것입니다.
진실함을 남길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길 원합니다.
조금 자신에게 은사나 달란트가 있음을 가지고 크게 부곽 시킨다라는 것입니다.
내가 일을 감당하고 이미 그것에 대한 영광을 취하면 그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5절
너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사람과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의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동안 그 일이 진실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진실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진실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진실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실한 헌신과 충성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뜻을 말을 한가지로 모을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고전 3장 23절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랑이 아닌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는 은혜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같은 말 같은 뜻, 같은 마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절)비판 받지 않으려거든, 판단받지 않으려면 판단하지 말라
1장 26절부터 29절에서 말합니다. 누가 존귀하고 누가 못나고 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는 판단의 기준을 갖지 말라 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제가 하는 설교를 통하여 판단 받고 있다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판단이라는 것은 같은 위치에서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도를 대하는 것 이것은 판단입니다.
지금의 시간은 판단의 시간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가르침을 받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마음에 부담이 되더라도 들으시고 돌이키시길 원합니다. 돌이켜 자신을 돌아보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판단이라는 것은 지금 내가 배우고 있는 것이 자랑되어 나타날 때에 보여지는 것입니다.
내가 배우거나 은혜를 받은 내용이 최고가 되어 그 말씀이나 이야기 외에는 다른 것이 들리지 않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주일에 가장 많이는 열심히는 새벽 5번 삼일예배, 금요기도회, 구역예배, 구역장 모임, 기도모임, 주일오전 오후 등 가장 많이 나올 수 있는 경우를 살펴보면 11번 정도의 참여입니다. 그러나 11번외의 열심을 가진 분들이 있다라고 생각해보세요. 성경과외를 받는 분들입니다. 정말 열심히 있고 교회를 위해 꼭 필요한 분들입니다.
어려서 과외 받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웠습니다. 그만큼 자랑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피아노, 바이올린, 암산, 주산, 컴퓨터, 등등의 악기를 배우는 사람들은 자랑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외를 받아서 성적 크게 오르지 않고 별로 뛰어나지 못한 친구들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이 이야기하더라고요 머리 좋은 놈 따라가지 못 한다 라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된다 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과외는 신앙이 좋은 사람들 그리고 나중에 헌신을 할 수 있는 사람들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것 그것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것과 같은 경우로 우리도 예배 이외의 것들에 참여를 하면서 그것이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파니, 어머니학교니, 아버지 학교니, 제자훈련이니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선배 신앙인들은 그냥 그 일들을 감당하면서 조용히 묵묵히 감당했습니다.
묵묵히 감당함을 보고 배웠다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은혜의 모습이 되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일들을 감당한 분들이 하는 이야기는 나의 조그만 헌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수단이고 그것을 통하여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교회의 예배에 대한 갈망이고 예배의 회복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워져가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이 속해있는 그룹이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 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무슨 일을 하나를 맡고 있으면 그것이 펑크나지 아니하게 최선을 다하려는 열심을 우리는 갖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면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안 됩니다.
한마음 한뜻 같은 말을 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저도 그러한 열심을 예전에 가져보았습니다.
청년 때에 찬양단을 하면서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제가 청년 때 찬양단을 그만두고 전도사 사역을 나아갈 때에 교회에서 기념패를 만들어 줄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지금도 저의 자랑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역을 나간다면 교회에서 기념패를 만들어 줄까요? 옆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나 다른 곳에 나가면 감사패하나 만들어 줄까?
열심히 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사역을 감당하면서 여러모로 부족한 부분이 있음에도 설치고 다녔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교회라는 공동체는 그것이 전부가 아닌데 제가 생각하는 교회는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만에 의한 판단을 낳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보지 못하고 자신이 속한 그룹만을 보게 되는 것 그것을 통해 같은 말, 같은 뜻, 같은 생각이 드러나지 않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가족 공동체이고 한 가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의 희생과 봉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한마음 한뜻, 같은 말로 새워져 나아가야합니다. 자신의 삶의 희생이 필요하고 나를 위해 죽으신 이가 누구인지를 분별하세요. 여러분에게 쓴 말이 들려질 때 그 말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 될 수 있다라면 아멘하며 내가 드러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임을 생각하고 자신을 부인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길 축원합니다.